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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롬톤 로우 라커 M6L-X 티타늄을 타고 있다. 언제 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자전거는 필요했지만 사이클이나 MTB는 곧 죽어도 타기 싫었다. 게다가 서울살이 남의 집 월세, 1인 가정이다. 2년 주기로 이사할 때마다 짐을 싸야 했으니 자전거도 기왕이면 작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잘 접히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선택지는 차례로 접혔고, 그 끝에 영국제 브롬톤 한 대가 남았다. 색상은 로우 라커. 모델명은 M6L-X였다. 알파벳에 담긴 브롬톤의 세계 당시 브롬톤의 모델명은 암호 같았지만 한번 풀어보면 단순했다. M은 클래식한 형태의 미드 핸들바, 6은 6단 변속, L은 머드가드가 달리고 리어 랙은 없는 구성을 뜻했다. 여기에 X가 붙으면 슈퍼라이트 모델이었다. 메인 프레임은 스틸이지만 앞 포크와 뒤쪽 리어 프레임을 티타늄으로 제작하고 일부 부품을 경량화해 일반 모델보다 무게를 덜어낸 버전이다. S 타입은 핸들바가 낮아 상체를 조금 더 숙이는 스포츠 주행에 가까웠고, M 타입은 몸을 세운 채 주변을 둘러보며 달리는 이른바 샤방 라이딩에 어울렸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기록을 줄이는 자전거가 아니라 서울을 느긋하게 흘러다닐 자전거였으니 M 타입을 골랐다. 로우 라커는 색이라기보다 마감에 가깝다. 프레임 위에 불투명한 도료를 덮지 않고 투명한 래커를 입혀 금속 표면과 접합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다. 당시에도 별도의 추가 비용을 내야 했고 티타늄 사양까지 더하면 가격표에서 자연스럽게 위쪽으로 올라갔다. 작고 단순하게 생긴 자전거가 가격만큼은 전혀 작고 단순하지 않았다. 지금은 C 라인과 P 라인, T 라인 등으로 제품군이 다시 나뉘었다. 브롬톤은 그사이 몇 번의 색깔놀이를 거쳤고, 멀쩡하던 라인업도 더 잘게 쪼갰다. 한정판과 협업 모델도 부지런히 내놨다. 예전 같았으면 새로운 색상이 나올 때마다 사진을 확대해봤겠지만 이제는 나도 나이를 먹었다. 색깔놀이에는 흥미가 사라졌고, 잘 팔리던 자전거에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 등급을 늘어놓는 모습은 솔직히 눈꼴사납다. 그럼에도 초창기에 구입한 나의 브롬톤 티타늄은 지금도 사무실 한켠에 있다. 감추지 않았기에 드러나는 것 브롬톤은 런던 공장에서 프레임을 만들고 자전거를 조립한다. 프레임의 접합 방식은 흔히 떠올리는 전기용접이 아니라 브레이징이다. 스틸 튜브 자체를 녹여 붙이는 대신 황동 계열의 용가재를 흘려 넣어 각 부위를 결합한다. 로우 라커 프레임 곳곳에 남은 금빛 흔적은 용접 비드가 아니라 이 과정에서 스며든 브레이징의 자국이다. 불투명한 도장이라면 얼마든지 가릴 수 있는 흔적을 로우 라커는 굳이 밖으로 꺼내놓는다. 회색과 녹갈색 사이를 오가는 프레임 위로 금빛 접합부가 번지고, 투명한 마감 아래에는 작업자의 손길이 그대로 남는다. 반듯하게 찍어낸 공산품이라기보다 누군가 불과 금속을 다뤄 완성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같은 로우 라커라도 프레임마다 표정이 조금씩 다른 이유다. 브롬톤이 브레이징을 고집하는 이유도 있다. 복잡한 접이 구조에 필요한 수많은 접합부를 안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고, 오랜 기간 사용했을 때 수리와 부품 교체에도 유리하다. 브롬톤을 두고 대를 이어 타는 자전거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튼튼한 프레임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공급되는 부품과 수리가 가능한 구조가 함께 자리한다. 영국에서는 브롬톤을 빌려 타는 전용 대여 도크도 운영한다. 한국의 따릉이처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공자전거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역 주변 보관함에서 접이식 브롬톤을 빌려 이동하는 풍경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한국에서는 값비싼 취미용 자전거로 취급받는 브롬톤이 영국에서는 일상적인 이동 수단으로 굴러다닌다. 누군가에게는 애지중지 닦아야 하는 수집품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차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타고 가는 발이다. 몇 그램을 줄이기 위한 개미지옥 브롬톤은 순정 상태로 끝내기 어려운 자전거다. 접는 방식과 프레임 규격이 오랫동안 유지된 덕분에 전용 튜닝 파츠가 넘쳐난다. 경량화를 앞세운 부품부터 성능과는 별 상관없이 멋짐만을 책임지는 부품까지 종류도 기가 막히게 다양하다. 문제는 대부분 가격까지 기가 막힌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그립이나 안장 정도만 바꾼다. 그다음에는 페달과 체인링이 눈에 들어오고, 힌지 클램프와 이지휠을 거쳐 어느 순간 티타늄 볼트의 무게까지 재고 있다. 몇 그램을 덜어내기 위해 지갑에서는 몇십만 원이 빠져나간다. 계산은 아무리 해도 맞지 않지만 만족감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정확하다. 작고 별것 없어 보이는 자전거에 부품 몇 개를 바꾸다 보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일도 흔하다.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낭비에 가깝지만 브롬톤 사용자 사이에서는 그것마저 멋짐으로 통한다. 완성품을 구입해놓고 다시 자기 방식으로 해체하고 조립하는 과정까지 브롬톤을 타는 재미로 받아들인다. 지금의 내 브롬톤도 순정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리디아 싱글 체인링을 장착했고 구형 텐셔너 대신 H&H 브롬톤 2~7단 텐셔너 드레일러를 이식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너트까지 티타늄 파츠로 바꿨다. 티타늄 모델을 샀다는 이유로 시작한 경량화가 결국 볼트와 너트까지 번진 셈이다. 물론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림 브레이크는 구조가 단순하고 오랫동안 검증된 방식이지만 제동력에서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평지에서 느긋하게 달릴 때는 별문제가 없지만 노면이 젖거나 내리막에서 속도가 붙으면 레버를 쥔 손에 힘부터 들어간다. 브롬톤이 샤방 주행을 위한 자전거라고 해도 도로의 돌발 상황까지 샤방하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갑자기 끼어들고 보행자가 자전거도로로 방향을 틀면 그 순간 필요한 것은 감성도 전통도 아닌 확실한 제동력이다. 오래 검증됐다는 말과 마음 놓인다는 말이 언제나 같은 뜻은 아니다. 다시, 행주산성 방향으로 곧 가을이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까지 뜨거워지는 계절이 지나면 브롬톤을 다시 꺼낼 때가 온다. 사무실에서 자전거를 펼치고 한강으로 내려가 행주산성 방향으로 달릴 생각이다. 서울은 자전거를 타기에 불친절한 도시처럼 보이면서도 한강에 내려서면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강을 따라 길게 뻗은 자전거도로와 다리 아래의 그늘, 편의점 앞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자전거와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불빛을 보고 있으면 자전거 타는 사람이 왜 서울에 살아야 하는지를 냉소적인 도시가 스스로 역설한다. 월세집을 옮겨 다니기 편하겠다는 이유로 작은 자전거를 골랐다. 그사이 집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브롬톤의 제품명과 등급도 달라졌다. 프레임에 달린 부품 역시 대부분 바뀌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오래 곁에 남은 물건은 영감님 마실용을 연상케 하는 작은 자전거다. 접히는 작은 자전거, 그래서 서울살이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trifold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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