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컴퓨텍스 부스에서 아마 한국인이라면 ‘잘만’이라는 회사를 혹여 몰랐다 할지라도 반드시 알게 됐을 것이다.
커다랗게 한글로 ‘잘만’이라고 쓰고 영문명을 병기했다. 한국 회사라는 것이 숨길 일이 아닌 것을 넘어 자부심이 됐다는 상징적인 징표이기도 하고, 잘만의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매년 참가하는 컴퓨텍스지만 처음으로 한글을 썼다고 한다. 컴퓨텍스를 총괄하는 김석기 실장은 “해외 지사 직원들은 한국 회사라는 것에 대한 이미지 상승 효과를 크게 체감하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한다”고 귀띔한다.
국내 PC 부품 업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체 개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 자부심을 잃지 않는 회사. 버티는 것이 하나의 역사가 된 곳, 잘만.
올해 컴퓨텍스에도 자체 개발 신제품을 대거 들고 나왔다. 1999년 설립 이후 ‘쿨러의 명가’로 불려 온 잘만은, 이번 전시에서 공랭·수랭 쿨러부터 케이스, 파워, 통합 소프트웨어까지 전 라인업을 자사 손으로 설계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웠다.
키워드는 분명했다. ‘직접 개발하는 글로벌 한국 기업’, 그리고 ‘K-잘만’이다.
‘쿨러 명가’의 기술력 — 자동차 ‘Z7’과 안 휘는 ‘힘제로’
올해 공랭 쿨러의 콘셉트는 자동차다. 항공기 엔진을 모티브로 삼았던 지난해 ‘Z5’에 이어, 올해는 자동차 타이어와 휠의 감성을 디자인에 녹인 ‘Z7’을 선보였다. 캐릭터까지 직접 개발했다. 외형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Z5에서 램(RAM) 간섭을 피하느라 작게 둘 수밖에 없었던 팬을, Z7에서는 히트파이프를 한쪽으로 틀어 공간을 확보하고 팬을 키웠다. 디자인으로 차별화하고 성능까지 끌어올렸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듀얼타워 공랭 쿨러 ‘힘제로’다. CNPS12·15X급 제품으로, 국내명에는 특별히 ‘힘제로’라는 일종의 코드명을 붙일 예정이다. ‘휘지 않는다’는 직관적인 메시지를 그대로 이름에 담았다. 듀얼 공랭은 배송 과정에서 휘어지는 문제가 고질적이었는데, 잘만은 하단에 넓은 면적의 잠금장치를 더해 무게중심을 잡고 강성을 높여 이 약점을 해소했다.
약 285~290W급 TDP를 감당해, 요즘 수요가 많은 라이젠 9800X3D급에 적합한 공랭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출시는 6월 말에서 7월로 예정돼 있으며, 7800X3D급을 겨냥한 일체형 하위 모델도 함께 준비됐다.
수랭 ‘알파3’와 자체 통합 소프트웨어 ‘오즈원’
수랭(AIO) 라인은 스테디셀러 ‘알파’ 시리즈의 후속인 ‘알파3’로 세대를 넘긴다. 온도·시계 표시 유무에 따라 보급형부터 LCD를 키운DS까지 라인업이 세분화됐다. 핵심은 역시 자체 개발 팬이다. 하우징 안쪽을 깎아 바람을 압축해 밀어내는 구조를 적용했고, 펌프는 어항 케이스에 어울리는 물고기 콘셉트로 디자인했다. 특히 DS 모델의 LCD는 마그네틱 방식으로 탈부착이 가능해 철판 케이스 어디에나 붙이고 시야각에 맞춰 돌려 쓸 수 있다. 떼어내면 램이나 그래픽카드 쪽에 붙여 보조 냉각용으로 활용하는 기능성 번들 팬도 함께 제공할 계획이다. 출시 시점은 9월로 잡혀 있다.
주목할 만한 발표는 자사 엔지니어가 직접 개발한 통합 소프트웨어 ‘오즈원(OZ ONE)’이다.
허브 하나로 시스템을 묶으면 케이스LCD와 수랭 쿨러 LCD, 팬 RPM까지 한 화면에서 제어할 수 있다. 나아가 파워서플라이의 실시간 출력을 디지털로 확인하고 팬 회전수를 수동 조절하는 기능까지 시연했다. 김 실장은 “해당 기능을 지원하는 파워는 아직 양산 전이지만, ‘우리는 여기까지 만들 수 있다’는 기술력을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즈원 역시 9월경 RGB·전원 통합 허브와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케이스·액세서리에 담은 ‘실용성’ 철학
케이스에서는 듀얼 챔버 어항 케이스 ‘D40’이 눈에 띈다. 파워를 뒤쪽으로 빼 전면을 컴팩트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어항 케이스의 약점으로 꼽히던 냉각을 팬 7개로 보완했다. 공기 흐름을 라운드로 유도하기 위해 측면을 꺾은 대형 듀얼 챔버 케이스, 슬림한 마이크로 ATX 모델까지 폼팩터를 넓혔다. 액세서리도 공을 들였다. 9.1인치 와이드 LCD에 CPU 온도와 부하, 날씨 등 각종 위젯 정보를 띄우는 ‘MF916’, LCD 정보 표시를 겸한 그래픽카드 지지대, 케이스 후면에 연결해 떼면 보조 모니터가 되는 제품 등 크리에이터와 방송인을 겨냥한 아이디어 상품이 줄을 이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시장에 없는 제품을 직접 만든다’는 개발 철학이다.
김 실장은 “뜬금없는 제품을 만들면 예술가이지, 기업이 아니다”라며, 실용성과 편의성을 갖춘 차별화 제품을 추구한다고 강조했다.
대략 6대 4에서 7대 3 수준으로 글로벌 매출이 더 높다. 유명하기는 쿨러가 유명하지만 매출은 파워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해외에서는 케이스, 국내에서는 파워의 선호가 두드러진다. 글로벌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잘만이 택한 길이 바로 ‘독자 개발’이었고, 오랜 우여곡절 끝에 뚜렷한 아이덴티티가 생긴 인상이다.
잘만테크의 컴퓨텍스 2026은 ‘K-잘만’이라는 한 단어로 모인다.
소싱이 일반화된 국내 컴포넌트 시장에서 자체 개발과 품질 관리를 고집해 온 한국 기업이, 한류로 ‘K’가 통하는 시대를 발판 삼아 글로벌 무대에서 다시 도약을 노린다. 쿨러 명가의 오래된 자존심이, 이제는 한글 이름을 단 신제품들로 새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다.
[잘만테크 김석기 실장과의 1문 1답]
Q. 잘만에서 7년, 업계 경력은 20년에 이른다고 들었다. 회사 분위기는 어떤가.
A. 농담 삼아 ‘미국 스타일 같다’고 말하곤 한다. 그동안 봐 온 용산 기반의 전형적인 국내 기업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게임 회사 같은 느낌이 강하다. 각 부서에 대한 존중 의식이 뚜렷하고, 부서마다 나오는 에너지가 거의 평등하다시피 하다. 경영을 맡은 분들이 용산 출신이 아니라 큰 기업을 거친 전문가들이어서 그런 면도 있는 것 같다. 매주 목요일 개발 회의에는 대부분의 직원이 들어오는데, 참석 인원만 20명을 넘는다. 직급에 막혀 의견을 못 내는 일은 없다. 평소에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계속 던지고, 그게 제품으로 이어진다. 약간 MZ 회사 같은 분위기랄까.
Q. 잘만의 일원으로서, 이것만은 꼭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다면.
A. ‘글로벌 시장에서 직접 개발하는 한국 기업’이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국내 컴포넌트 업계에서 자체 개발까지 하는 회사는 사실상 거의 없다. 대부분 소싱(외부 조달) 위주인데, 잘만은 시장에 없는 제품을 직접 설계하고, 그만큼 품질 관리와 자부심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영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게 가장 큰 메리트다. 물론 직접 개발에는 리스크가 따르지만, 그걸 실용성에 맞춰 잘 검토해 내놓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20년 가까이 이 업계에 있으면서 그중 7년을 잘만에서 보낸 이유이기도 하다. 윗세대 사용자분들이 여전히 ‘잘만은 쿨러 명가’라는 인식을 갖고 계신데, 그 브랜드 가치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고 믿는다.
Q. 신제품에 ‘힘제로’ 같은 한글 이름을 붙였다. ‘K-잘만’을 내세우는 이유는.
A. ‘힘제로’는 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전하는 이름이다. 한글로 쓰면 한국적인 느낌이 더 산다고 봤다. 늘 영어로만 가다가 한글을 넣은 건, 작지만 분명한 포인트다. 방탄소년단부터 영화까지 한국이 워낙 많이 알려지면서, 해외 영업 현장에서는‘K’ 자체가 무기로 느껴진다고들 한다. 그래서 디자인이나 네이밍에 한국적인 색을 녹여내려 한다. 잘만은 한국 기업으로서 직접 개발하는 ‘K-잘만’으로 성장하고 싶다. 글로벌에서 점유율이 아직 높다고는 못 하지만, 우리만의 제품으로 계속 두드리고 있다. ‘잘만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것, 그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