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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지로버, 진흙탕에서 태어나 호텔 정문으로 간 SUV 
쪽지 2026-05-0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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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지로버, 진흙탕에서 태어나 호텔 정문으로 간 SUV

 

SUV라는 단어가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요즘은 마트 주차장만 가도 SUV가 넘친다. 소형 SUV, 쿠페형 SUV, 전기 SUV, 패밀리 SUV, 럭셔리 SUV까지 종류도 끝이 없다.

그런데 이 많은 SUV들 사이에서도 유독 따로 노는 차가 하나 있다.

 

레인지로버.

 

그냥 비싼 SUV라기보다, 어딘가 이상한 위치에 있다. 오프로드를 잘 달리는 차인데 실내는 고급 세단처럼 꾸며져 있고, 산길을 올라갈 수 있는 차인데 호텔 발렛존에 세워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진흙탕을 빠져나온 뒤 그대로 고급 리조트 입구에 서도 품위가 죽지 않는 차. 레인지로버의 정체성은 딱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작업복을 입은 귀족 같은 차다.

시작은 럭셔리가 아니라 ‘불편함에 대한 반항’이었다

 

레인지로버가 처음부터 지금처럼 조용하고, 넓고, 비싸고, 의전차 같은 SUV였던 것은 아니다.

 

레인지로버가 등장하기 전 랜드로버의 대표 모델들은 지금의 디펜더 조상쯤 되는 차들이다. 농장, 군대, 공사 현장, 험지에서 쓰기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튼튼하고 잘 달렸지만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내는 투박했고, 승차감은 단단했고, 정숙성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자동차를 쓰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가 늘고, 장거리 이동이 많아지고, 여가와 레저 문화가 커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험지만 잘 가는 차”만 원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편하게 타고,
멀리 갈 때는 안정적이고,
필요하면 산길과 진흙길도 가는 차.

 

당시 기준으로는 꽤 욕심 많은 요구였다. 고급 세단은 편했지만 험지를 못 갔고, 오프로더는 험지를 잘 갔지만 일상에서는 불편했다. 이 둘을 한 차에 넣겠다는 발상은 지금 보면 당연해 보여도, 당시에는 꽤나 대담한 생각이었다.

 

레인지로버 개발을 이끈 인물로 알려진 찰스 스펜서 킹의 질문도 여기서 출발한다.

 

“왜 오프로드 차량은 꼭 불편해야 하지?”

그 질문 하나가 훗날 럭셔리 SUV라는 장르의 씨앗이 됐다.

 

비밀 프로젝트 ‘벨라’, 그리고 1970년의 등장

 

초기 개발은 조용히 진행됐다. 프로토타입에는 ‘레인지로버’라는 이름도 붙지 않았다. 대신 벨라(Velar)라는 이름을 썼다. ‘숨기다’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레인지로버 벨라라는 모델명으로 다시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에 가까웠다.

 

그리고 1970년, 마침내 1세대 레인지로버가 등장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실내가 고급스럽다기보다 실용적이다. 바닥은 고무 매트였고, 물청소가 가능할 정도로 막 쓰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오프로더 기준으로는 굉장히 진보적이었다.

 

리프 스프링 대신 코일 스프링을 적용해 승차감을 개선했고, 풀타임 4륜구동으로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모두 고려했다. 여기에 V8 엔진까지 얹어 고속 주행 능력도 챙겼다.

 

즉, 레인지로버는 처음부터 “비싼 차”가 아니라 험지를 달릴 수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탈 만한 차로 출발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차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편하고, 크고, 당당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차.
상류층과 레저 문화가 이 차를 그냥 두지 않았다.

 

농장과 산길을 위한 실용적인 차는 점점 귀족의 별장, 사냥터, 리조트, 도심 고급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레인지로버는 단순한 오프로더가 아니라, 험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급 이동 수단으로 이미지가 바뀌어 갔다.

 

세대를 거치며 ‘왕좌’가 만들어지다

 

1세대 레인지로버는 무려 26년 가까이 판매됐다. 처음에는 2도어로 시작했지만, 1981년에는 4도어 모델이 등장했고, 1982년에는 자동변속기가 추가됐다. 1986년에는 디젤 엔진 모델도 나왔다. 한 세대 안에서 계속 변신하며 시장을 넓혀간 셈이다.

 

1994년에 등장한 2세대 P38A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레인지로버의 인상을 훨씬 뚜렷하게 만들었다. 플로팅 루프, 클램쉘 보닛, 수평적인 차체 라인, 스플릿 테일게이트 같은 요소들이 이 시기부터 브랜드의 얼굴이 됐다. 실내도 더 고급스러워졌고, 전자식 에어 서스펜션으로 오프로드와 온로드 양쪽에서 더 편안한 주행을 노렸다.

 

2001년 등장한 3세대 L322는 레인지로버가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럭셔리 SUV에 가까워진 시기다. 차체 구조는 더 단단해졌고, 독립식 에어 서스펜션과 지형 반응 시스템 같은 기술이 들어가면서 “험지에 강한 고급차”라는 콘셉트가 더 정교해졌다. 실내는 요트, 고급 가구, 퍼스트 클래스 좌석 같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끌어왔다. 이제 레인지로버는 단순히 좋은 SUV가 아니라, SUV 형태를 한 응접실에 가까워졌다.

 

2012년에 나온 4세대 L405는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았다. 알루미늄 바디 구조를 적용하면서 무게를 크게 줄였고, 승차감과 정숙성은 한층 더 좋아졌다. 밖에서는 거대한 SUV인데, 안에서는 고요한 라운지처럼 느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5세대 L460에 오면 레인지로버는 더 미니멀해진다. 선을 줄이고, 장식을 덜어내고, 차체를 매끈하게 다듬었다. 예전의 레인지로버가 “나 비싼 차야”라고 어느 정도 말하는 차였다면, 최신 세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에 가깝다. 퍼팅라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제된 디자인은 호불호를 떠나 확실히 존재감이 있다.

 

사막의 롤스로이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레인지로버를 두고 흔히 사막의 롤스로이스라고 부른다. 

표현이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차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 잘 맞는 별명이다.

 

험지를 갈 수 있는 차는 많다.
편한 차도 많다.
비싼 차도 많다.

하지만 험지를 갈 수 있으면서, 그 안에서 운전자를 귀빈처럼 대접하고, 도심 고급 호텔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 차는 많지 않다.

 

레인지로버의 진짜 매력은 분위기에 있다. 높은 시야, 묵직한 차체, 두꺼운 문, 고요한 실내, 푹신한 에어 서스펜션, 광활한 2열 공간. 특히 롱휠베이스 모델의 뒷좌석은 그냥 좌석이라기보다 작은 방에 가깝다. 실제 시승기에서도 5세대 P530 LWB는 최고급 세단 못지않은 안락함과 고요한 실내, 530마력의 성능을 갖춘 럭셔리 SUV로 평가된다.

 

이 차를 타면 이상한 여유가 생긴다.
급하게 달리기보다 천천히 운전하게 된다.
빠른 차라기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의 차처럼.

 

물론 실제 구매자 중 진흙탕에 집어넣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백화점, 골프장, 고급 아파트 주차장, 호텔, 공항 의전차량으로 더 많이 쓰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갈 수 있느냐”다.

 

레인지로버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차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만 굳이 안 갈 뿐이다.”

이 묘한 오만함이 바로 레인지로버의 매력이다.

 

럭셔리 SUV 시장을 만든 원조의 무게

 

요즘은 벤틀리 벤테이가, 롤스로이스 컬리넌, 메르세데스-마이바흐 GLS, BMW XM 같은 초고가 SUV들이 시장에 잔뜩 들어와 있다. 이제 럭셔리 SUV는 더 이상 레인지로버 혼자만의 놀이터가 아니다.

 

그럼에도 레인지로버가 특별한 이유는, 이 장르를 오래전부터 파고들어 온 원조의 감각 때문이다. 경쟁자들은 대체로 고급 세단의 세계에서 SUV로 내려왔다. 반면 레인지로버는 진흙탕에서 출발해 고급 호텔로 올라왔다. 출신 성분이 다르다.

 

그래서 레인지로버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그냥 커다란 고급차가 아니라, 원래부터 길이 없는 곳을 가던 차가 점점 귀족화된 느낌이다.

벤틀리와 롤스로이스가 “우리도 SUV 만들 수 있어”라고 말한다면, 레인지로버는 “나는 원래 이쪽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게 레인지로버가 가진 브랜드의 힘이다.
차를 잘 만들어서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인 서사가 차체 위에 같이 올라타 있다.

 

여기까지 보면 레인지로버는 거의 완벽한 차처럼 느껴진다.
품위 있고, 조용하고, 넓고, 잘 달리고, 험지도 간다.
운전자는 귀족이 된 것 같고, 동승자는 호텔 라운지에 앉은 것 같다.

하지만 레인지로버 이야기를 하면서 이 대목을 빼면 반칙이다.

 

문제는 고장이다.

 

레인지로버는 오래전부터 극악의 고장률로 악명이 높다. 자동차 커뮤니티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까지 나온다.

“레인지로버는 두 대를 사야 한다. 하나는 타고, 하나는 서비스센터에 넣어두려고.”

 

물론 모든 차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관리 잘하고, 뽑기 잘하고, 보증 기간 안에서 타면 천상의 이동수단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보증이 끝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전자장비, 에어 서스펜션, 냉각 계통, 각종 센서, 잡소리, 경고등. 고급스러운 실내 조명보다 먼저 계기판 경고등이 주인을 반겨주는 경우도 있다.

 

레인지로버는 누군가에게는 인생 최고의 차다.
한 번 타면 다른 SUV가 심심해지는 차다.
높은 시야와 고요한 실내, 그 말도 안 되는 품위 때문에 계속 생각나는 차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시는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만드는 차다.


차는 분명 천국 같은데, 같은 증세로 서비스센터 예약을 두번 하고나면 필시 또 고장나게 된다. 

 

그래서 레인지로버는 참 이상한 차다.

타는 순간에는 “역시 이 급은 다르다” 싶다가도,
고장이 나면 “역시 이 브랜드는 다르다”는 말이 다른 의미로 나온다.

 

 

1억이 훌쩍 넘는 고가 SUV인 만큼 대다수 사람에게는 그저 남이 타는 고급차일 뿐이다. 도로에서 보면 멋있고, 주차장에 세워져 있으면 존재감 있고, 기사로 보면 갖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 내 통장에서 수리비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그 낭만은 꽤 빠르게 증발할 수 있다.

 

결국 레인지로버는

 

가질 수 있으면 부럽고,
유지할 수 있으면 대단하고,
보증 끝나도 사랑할 수 있으면 진짜 주인이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 레인지로버는 그냥 멀리서 볼 때 가장 아름다운 SUV일지도 모른다.


마치 영국 귀족처럼 우아하게 손을 흔들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조용히 청구서를 내미는 자동차.

천상의 승차감과 지옥의 정비비를 동시에 품은 차.
그게 바로 레인지로버의 가장 솔직한 얼굴이다.

 

“ 커뮤니티 빌런 18+ 에서만 볼 수 있는 브랜드 스토리 레인지로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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